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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

직지사(直指寺)는 행정구역으로 김천시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에 불교가 정식으로 인정받기 전인 418년 눌지왕 2년에 아도화상에 의해 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에 이어 지어졌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불교가람이다. (신라는 법흥왕때인 527년에 불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했다.)

영조 55년(1776)에 급고자(汲古子)가 정리한 김산직지사중기(金山直指寺重記)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 눌지왕때 지어진 사찰로 인정되고 있다.

사찰의 이름인 직지(直指)는 여러 뜻으로 설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로보면 그것의 바로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는다'라는 글귀로 줄여서 '직지'라고 표현하며 바로 직지사의 이름이 되었다.

아도화상이 해평의 도리사를 창건하고 지금의 직지사의 위치를 손으로 직접 가리켜(直指) 절터를 지명했다는 설과 고려때 직지사를 중창한 능여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직접 손으로 측량했다는 설 등이 더 있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견훤과의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여 이곳에 피신했었던 이유로 고려시대때 크게 번창했었고, 조선태조를 도운 적이 있어서 조선초기에도 계속 번창했었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키고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 3천명을 데리고 돌아온 사명대사가 출가했으며 주지로 지냈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온전히 국가의 보호를 받았던 영남의 대표사찰 중의 하나였으며, 유정 사명대사로 인해 호국불교의 사찰로서 추앙받았으나 그로인해 임진왜란때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고, 몇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 직지사는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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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의 사찰 관람료(문화제 관람료)는 다른 곳에 비해 비싼 편이다. 어른 2,500원이면 적지않은 금액이다. 대신 직지사입구에 만들어진 식당가가 있는 넓은 주차장에는 별도의 주차료를 받지 않는다. 또한 사찰의 입구에 2004년 조성된 직지문화공원을 생각하면 관람료의 가격은 결코 아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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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가 주차장 말고도 사찰의 입구엔 불법건축물을 철거한 공터 자리에 주차할 공간이 있다. 올해안으로 이 곳도 공원시설로 바꿀 예정이라고 푯말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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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권을 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포장된 나무숲 터널이다. 황악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한 이곳은 한여름에도 아주 시원하다고 한다. 다만 이 길은 사찰의 입구인 만세교를 지날때까지 아스팔트포장되어 있어 고즈넉한 산사길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휴양림 입구에 들어선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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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들어진 만세교를 바로 지나자마자 오른쪽엔 해우소가 보인다. 참고로, 직지사의 거의 모든 건물들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들이 없다. 왜란으로 소실되고 자연히 허물어진 것들을 조선 중기, 후기에 걸쳐 보수와 중건 작업을 했고, 근대에 들어서도 여러차례 중건을 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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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경내는 다른 곳에 비해 넓다. 그만큼 직지사가 예전에 얼마나 큰 도량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황악산 아래 넓게 펼쳐진 도량은 산사라는 느낌보다는 공원이라는 느낌처럼 넓게 자리잡고 있다.

또한 오래된 목조건물과 템플스테이 등을 위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관람과 문화재로서의 사찰기능뿐만 아니라 실제 불교과 가르침, 깨달음을 실천하는 가람으로서의 역할을 수행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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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소개가 없는 입구쪽에 있는 비석들은 어떤 사연으로 저렇게 서 있는지 궁금하다. 가까이 가서 볼 수 없도록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아마도 국가에서 세운 기록비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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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직지사에도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은 일직선으로 두 개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독특한 건축물로 세속의 번뇌를 씻고 들어서라는 첫번째 관문이다. 현판엔 '황악산직지사'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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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번뇌뿐만 아니라 잡귀들을 쫓는 대문들이 몇 개 더 있다. 부처님의 도량을 무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악귀는 들어서지 못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인들은 하나같이 서역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교가 유래된 인도와 중동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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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사찰은 일주문 다음에 금강문이 있다. 금강문은 불법(佛法)을 방해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무리를 경계하고 잡귀 귀신을 막는 역할을 하는 문이다. 힘이 센 '나라연금강'과 금강저를 쥐고 있는 '밀적금강'이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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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과 달리 금강문에는 목각조형이 아닌 탱화의 형태로 사찰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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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왜군들의 침략에도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몇안되는 건물 중의 하나인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악귀를 쫓아내고 사찰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세워진 건물이다. 보통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면 천왕문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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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에 용을 움켜쥐고 왼손에 여의주를 쥐고 있는 '증장천왕', 오른손에 삼지창 왼손에 보탑을 들고있는 '광목천왕', 비파를 들고 있는 '다문천왕', 보검을 쥐고 있는 '지국천왕'이 사(四)천왕이다. 동서남북의 불국정토를 지키는 뜻에서 사천왕이 존재한다. 동쪽은 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지킨다.

천왕문을 지나면 능여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의 일부가 사찰내로 흐르는 도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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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여 수돗물인가 싶기도 하지만,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수이다. 직지사는 사찰 어디를 가도 물이 풍부하다. 황악산 자락의 능여계곡은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있어서 경내엔 마실 수 있는 물과 흐르는 물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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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萬歲樓)가 불이문의 역할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누각을 지나면 비로소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이 펼쳐진다. 불이문은 불국정토가 시작되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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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앞엔 석탑이 둘 있는데, 이 두 탑 모두 직지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문경의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것들이다. 1976년에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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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大雄殿)은 부처를 큰 영웅이라고 지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대웅전엔 부처님을 모신다. 직지사 대웅전엔 삼존불탱화가 유명한데, 영조20년인 174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16명의 화승이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불화를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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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바로 뒤엔 나무가 울창한 숲인데, 예전에만 해도 이곳엔 학들이 군락을 이루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이름이 황악(학)산인지도 모르겠지만, 함께 사찰을 둘러보던 아버지께서 예전 이곳에 학이 많이 살았다고 알려주셨다.

대웅전앞 마당엔 이상한 조형물이 하나 있는데, 포대화상이라는 스님상의 성금함이다. 치매노인을 위해 금오종합사회복지관에서 성금을 받는 조각물이다. 대웅전앞에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에 사실 좀 의아스럽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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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통받는 중생을 위한 현대 불교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주 현실적인 사찰의 시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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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배치가 그러하듯 대웅전 왼쪽(대웅전에서 봤을때는 오른쪽)에는 범종각이 위치해 있다. 불국정토로 온 구도자를 환영하기 위해 주악을 연주하는 것이 범종이다.

범종 아래 수북히 동전이 쌓여있다. 운을 비는 사람들이 던진 것인데, 범종 말고도 조그만 연못이나 석등의 사이사이, 야외 전시장에 있는 석불에도 동전이 붙어 있다.

범종각에는 법전사물(法殿四物)이라 하여 범종, 목어, 법고, 운판이 함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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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는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안을 파내서 비어있다. 물고기처럼 잠자지 않고 도를 닦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름모양의 운판은 허공을 헤매는 고독한 영혼을 천도하는 역할을 한다. 법전사물은 모두 두드려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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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대웅전 마당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찾는 이의 수는 많지 않았다. 관람객과 불자들이 반반 정도로 불자의 발걸음이 많은 수행 가람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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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에는 예불을 수행 중인 스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쉼없는 오체투지의 예불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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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엔 호국성사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한 사명각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안에는 사명대사의 영탱(영정을 그린 탱화)을 봉안한 건물이다. 편액의 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씌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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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의 볼거리 중 하나인 비로전(盧殿)이다. 천불전(千佛殿)이라고도 불리며 신남신녀가 많이 찾는 곳이다. 천불은 원래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중에서 현재의 천불을 신앙하는 불교의 신앙형태이다. 말 그대로 천개의 불상을 모시는 것이다. 천개의 불상은 모두 모습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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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사람이 그러하듯 불상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천불전(비로전)은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는 예비산모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그것은 천불 중 알몸의 동자상때문인데, 비로자나불 뒤에 혼자 서 있는 동자불상을 제일 먼저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때문이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엔 노사나불, 오른쪽엔 석가모니불이 함께 있다.

천불들은 모두 경주 남산의 옥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경잠스님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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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곳곳에 있는 바위위엔 중생들의 소망과 운을 비는 돌탑들이 많이 보이는데, 사진처럼 동자불상을 얹어놓은 바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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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는 많은 불제자들이 수련을 하기 때문에 사찰내에 이렇게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곳들이 더러 있다. 수행을 정진하거나 공부를 하는 이곳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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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엔 은행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다. 은행나무야 말로 가람의 역사를 온몸으로 알려주는 증거가 아닐까. 유난히 직지사엔 은행나무들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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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내에는 성보박물관이 따로 있는데, 이곳엔 1천원의 관람료를 내야 입장할 수 있다. 찾아간 날은 시간관계상 들어가 보지 못했다. 대신 마당에 놓여 있는 석조 예술품들을 감상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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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풍부한 직지사답게 연못과 다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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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구경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엔 산중다실이 있다. 이리저리 가람을 둘러본 후 잠시나마 산사의 기분을 더하기 위해선 벗과 함께 차를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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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불제자들과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교육과 숙식을 하는 곳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일반인들이 절밥이라 하여 채식을 위주로 하는 요리가 이루어지는 곳인 것 같다. 각종 장종류 등을 보관하는 단지가 인상적이다.

현대식 당우(사찰 건물)들은 대부분 최근 30년 안에 지은 것들이다. 불교교육과 연구를 위한 건물들인데, 원래 직지사의 당우는 한때 250여동이었다고 한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지금은 65동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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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에서 내려오는 능여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황악산으로 오르는 등산길이기도 하다. 계곡을 사이로 가람과 숲이 구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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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를 걸으면서 진한 밤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운좋게도 밤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알려주셔서 알 수 있었다. 그 전엔 밤꽃이 어떻게 생긴지도 몰랐다. 그리고 특유의 밤꽃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밤꽃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꽃이자라는 끝부분에 밤이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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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담벼락엔 넝쿨이 마치 고성의 성벽을 감싸듯 풍성하게 자라있다. 세월의 자락만큼 그 자태가 고고해 보이지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 갈색의 뼈마디만 남아 있는 모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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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라 그런지 온통 녹색과 푸르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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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꽃이라 불리는 망초에 벌레가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카메라를 바로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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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라 부르는 뽕나무 열매는 옛날 어릴적 기억을 맛으로 상기시킨다. 온입술과 입안을 검게 만들었던 오디는 직지사 주변에 널려 있었다. 약을 치지않은 천연의 열매라서 그런지 나이드신 분들은 염치불구하고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오디맛이 옛날을 기억하게 하는지 오디를 따면서도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다. 나도 하나 얻어먹어 보았다. 풀향기 가득한 오디맛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오디로 술을 만들기도 하는데, 요즘은 구경하기도 힘들다.

직지사에서 상가쪽으로 걸어가다보면 노변에 오디파는 장사도 여럿볼 수 있다.

직지사는 김천과 구미, 대구에 사는 분들이 많이 찾는 사찰이다. 한때 크게 시세를 떨치던 시절에 비하기는 힘들지만 여전히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훌륭한 문화재이자 휴식처다.

더군다나 사찰앞에 조성해 둔 직지문화공원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만큼 훌륭한 자연공원이다. 따로 포스팅을 하겠지만, 직지문화공원과 상가와 함께 직지사를 둘러보는 코스는 하루를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멋진 투어코스이다.

불교에 대해 약간만 공부하고 가면 정통사찰의 면모를 골고루 공부할 수있는 곳이기도하므로 아이손잡고 주말에 찾아보면 좋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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